Category Archives: Culture

소신을 지킬 수 있는 용기: 변화의 촛불을 켜라

“바보야. 세상은 원래 상식적이고 공정하기 보다는 권력을 가진 놈들이 쥐고 흔드는 거야. 회사도 마찬가지지. 너 같이 맨 앞에 서서 큰소리를 내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희생되는 거야. 정 바꾸고 싶다면 일단 가만히 있으면서 위로 올라가서 바꾸면 되지.”

우리 아버지가 예전부터 나를 걱정스러워 하시며 하시던 말씀이다. 아마 비슷한 대화가 많은 부모 자식 간에 수도 없이 오가고 있지 않을까? 나도 자식을 가져 보니 아버지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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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정말 아닌데”, “이 방향은 잘못 되었는데”. 누구나 머릿속으로 생각했을 것이지만 대부분은 입 밖에 안 냈을 말. 조직에 속해 있다면 윗사람들의 의견에 소신 것 이야기 하는 것은 큰 Risk 이다. 특히, 어른에 대한 공경을 중요시 할 뿐만 아니라 권위주의와 상명하복이 뿌리깊게 박혀 있는 우리 나라 문화상 ‘잘난 체 하는 놈’, ‘싸가지 없는 놈’으로 찍히기 십상이다. 때문에 아무리 잘못된 지시 사항이라도 위에서 내려오면 그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나서서 먼저 이야기 하길 바랄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나서서 이야기 하는 사람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말해 봤자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용기를 내어 이야기 한 당사자만 피해를 보는 경우를 직, 간접적으로 접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서히 본인의 소신은 사라져 가고, 윗사람들의 지시에 수동적으로 따르는 샐러리맨이 되어간다. 일에 대한 주인의식 보다는 윗사람을 위한 충성심의 연기력과 눈치만 늘 뿐이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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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침묵이다.”
“Nothing strengthens authority so much as silence.” – Leonardo da Vinci

이렇듯 한국 사람들이 가장 잘 하는 것은 불만 표시하지 않고 견디기 이다. 아무리 비합리적인 처사를 받아도 침묵한다. 이러한 침묵은 치킨게임과 같다. 먼저 버티질 못하고 조직에 불만을 표시하며 불응하는 놈은 찍혀서 경쟁에서 뒤처진다.

교수들이 학생들을 착취를 해도, 회사에서 상관이 비합리적인 근로를 시켜도, 정부가 특정 기업이나 조직의 편의를 봐 줘도, 운동 연맹들이 파벌을 만들어 편파판정을 해도, 군대에서 상관이 인격적인 모독과 폭력을 행사해도 오로지 침묵 뿐이다.

“그래도 난 살아 남았어.”

“경쟁자 한 명은 따돌렸네.”

이러한 누가 상사 비위 잘 맞추고 묵묵히 따르나를 가지고 경쟁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모두를 파멸로 몰고 간다. 이렇게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은 더더욱 견고해 지고,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오늘날의 국정농단사태가 이러한 침묵들이 모여서 생긴 대표적인 예 아니겠는가? 흥미롭게도 대한민국 최고의 기득권 자가 휘두른 권력과 비합리적인 행동들에 대한 분노로 인해 우리는 답을 찾았다.

Burning Christmas candles

“어둠을 탓하기 보다는 한 자루의 촛불을 켜라.”
“It is better to light a candle than curse the darkness.”  – Eleanor Roosevelt

개개인으로 큰 힘은 없지만, 작은 촛불들이 모이면 가장 강력한 자리에 있는 기득권이라도 끌어내리거나, 적어도 불합리한 행동들에 대한 책임을 물릴 수 있다. 이것은 회사, 군대, 협회 등 어떠한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더이상 비합리적인 지시에 무조건 침묵 하기 보다는 왜 그런 지시를 하였는지에 대해 질문을 하고, 더 나아가서는 부정적인 의견을 표현해야 한다. 물론, 본인이 가늠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말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많아 질수록 비합리적인 지시를 내릴 때 한번 더 생각 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조금만 더 불편하게 만드는 것만 해도 작은 승리라고 본다.

당연히 아직도 기득권,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반항’하는 것에는 Risk가 존재하고, 변화는 고통스럽고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침묵이 가져 올 수 있는 무서움과,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다는 희망을 봤다고 생각한다. 이번 국정논단사태와 촛불집회를 통해 대한민국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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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ki is a career & recruiting consultant, and a cross cultural trainer living in Seoul. You could find more about him(both in Korean & English) if you visit his introduction page here.

저자인 은진기는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커리어 컨설턴트/헤드헌터 이자 이문화 교육 전문가이다. 그에대해 더 알고 싶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한국의 교육과 직장] 빨리빨리 대한민국 그 이후

나는 수학이 싫었다.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었고 성적도 시원치 않았다. 내 머리가 문과 쪽으로 발달을 해서 그런지 나는 ‘숫자’가 들어간 모든 과목들이 싫었다. 한국에서 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미국 고등학교로 입학을 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수학이 너무 쉬웠다. 심지어 성적이 잘 나오니 재미있기 까지 했다. 미국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수학은 한국 중학교 때 이미 다 배웠기 때문이었다. 배웠 다기 보다는 정답을 찾는 방법을 익혔다는 표현이 더 올바를 것이다.

이것은 20년 전 이야기이다. 예전에도 이렇게 쓸데 없이 빠르게 수업 진도가 나갔지만 지금의 한국에서는 선행학습이라는 이름 하에 수 많은 초등학생들이 중학교 과정을, 중학생이 고등학교 과정을 미리 학습하고 있다. 유치원생들조차 미리 배우지 않으면 초등학교 들어가면 수업을 따라 잡을 수 없다며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선행 학습을 시키고 있다. 결국 학생, 부모, 교사들은 피해자이고 학원들 배만 배불리는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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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 ‘공부하는 인간’에 하버드 이과생들이 한국 고등학교 입시학원을 방문하여 극한 문제 풀기에 도전하여 10분동안 헤매고 정답도 틀렸지만, 한국 학생들은 고등학교 2학년때 학교에서 배운 쉬운 문제라며 척척 풀어낸 것을 보면 그 차이를 실감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 블로그에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교육 방식은 바뀌어야 한다. ‘빨리빨리’ 보다는 그 학년에 ‘적합하게’, 그리고 ‘문제 푸는 방식’, ‘획일적인 정답’만을 찾는 암기식 위주 보다는 비판적 사고력(critical thinking)을 키우고, 학습하는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말이다.

[한국 VS 미국 교육]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한국 학생들

우리나라 교육을 대표하는 ‘입시위주 교육’과 ‘주입식 교육’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의 교육은 각 학생들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적성과 흥미를 찾아가는 과정이기 보다는 획일적인 잣대로 대학교 입학을 위한 시험성적 만들기를 최고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이러한 획일화된 교육은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물론, 본인의 장단점과 적성에 대해 고민할 기회와 다양한 재능을 발견할 기회를 박탈한다.

직장에서도 이어지는 빨리빨리 대한민국

미국, 베트남, 런던, 인도네시아, 중국 등 여러 나라의 외국인들에 대한 이문화 교육을 해 왔다. 한국에서 근무한지 얼마 되지 않는 임직원들도 ‘빨리빨리’ 라는 단어는 알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긴장감 있게 빠르게 움직이는 한국 임직원들을 보며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나 역시 한국 회사를 다니면서 정말 놀라왔던 점은 오래 전부터 주도 면밀하게 계획한다는 점과 계획데로 차질 없고 빠르게 돌아가는 시스템이었다. 한국의 강점인 효율성과 신속함을 최대한 활용하자는 전략일 것이다. 하지만 더 큰 충격 이였던 것은 잘못된 방향인지 나중에 알더라도 이미 굴러가고 있는 프로세스를 멈추고 수정하기 보다는 윗사람에게 그렇게 보고를 했기 때문에, 아니면 이미 그 방향으로 상당한 투자가 들어갔기 때문에 그대로 진행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는 것이다. 아마 이번에 발생한 갤럭시 사태도 이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도의 200여기업을 조사한 결과, 금융 수익이 가장 높은 기업들은 CEO가 효율성과 신속함에 대해 자신을 가장 낮게 평가 한 기업들이었다.

가장 성공적인 조직은 일에 착수하기 전에 시간을 허비하고 제때에 일을 끝마치지 못할 때가 있다고 인정한 지도자들이 이끄는 조직이었다. 이러한 습성은 작업의 진전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전략적으로 훨씬 유연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주도 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일찍 행동을 개시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CEO들은 훨씬 전략적으로 경직된 사고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런 유형의 사람들은 일단 전략이 수립되면 그 전략을 고수했다.” <애덤 그란트 ‘오리지널스’ 중>

예전 많은 자원을 투자하여 주도 면밀하게 계획하고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운영 되어야 하는 철강, 조선, 반도체, 전통 제조업 등에서의 성공은 한국인의 빨리빨리 DNA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미리 준비를 하고 성실하게 계획을 실행 하는 것에 대해 한국의 교육이나 기업의 시각은 바꿔야 한다고 본다. 주도면밀한 계획과 실행은 한치 앞도 미리 예상을 할 수 없는 시대에 맞춰 적응을 해 나갈 수 있는 유연성을 빼앗아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시장과 기술의 변화에 맞춰 유연하게 전략을 변화 할 수 있는 기업, 재빠르게 국가의 고객들에게 Customized 된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 할 수 있는 기업만이 성공을 할 것이다. 또한, 그렇기 위해 위에서 시키는 데로 빨리빨리 업무를 처리하기 보다는 본인의 생각, 통찰력과 주관을 가지고 의사결정을 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도록 훈련이 된 임직원들과 그들에게 권한과 책임을 적절하게 위임 할 수 있는 기업문화와 업무 프로세스가 정착 되어야 한다.

이제 한국의 교육, 그리고 기업 모두 빨리빨리, 미리미리, 성실하게 라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학생들, 또는 기업의 직원들만으로는 바꿀 수 없다. 학부모와 기업의 리더들부터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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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ki is a career & recruiting consultant, and a cross cultural trainer living in Seoul. You could find more about him(both in Korean & English) if you visit his introduction page here.

저자인 은진기는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커리어 컨설턴트/헤드헌터 이자 이문화 교육 전문가이다. 그에대해 더 알고 싶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한국용 인재(Korean Talent)와 글로벌 인재(Global Talent)

한국형 인재

국내외 어디에서든 성과를 낼 수 있는 사람을 글로벌 인재(Global Talent) 라고 한다. 대다수의 회사가 원하고 많은 임직원이 되고 싶어하는 이러한 글로벌 인재는 한국 대기업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실질적으로 회사에서 성공하는 한국형 인재가 되기 위해 필요한 태도나 역량은 글로벌 인재에게 필요한 것과 상반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예로, 글로벌 환경에서는 독립된 시각을 가지고 자신만의 주장을 펼치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고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인재가 성공한다. 반면 동양에서는 윗사람에 대한 공경과 겸손이 우선이다. 자신만의 주장을 내세우기 보다는 조직에 대한 충성과 화합과 집단의 이익이 우선이다.

영어와 국제적 노출 경험(International Exposure)이 중요

또한, 국가마다 차이가 있지만 유럽이나 북미쪽의 다국적 기업은 본사의 구성원이 다양한 문화에 노출되어 있으며, 세계 공용어인 영어에 익숙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해외에 주재원으로 가던가 본사에 해외사업 관련 부서에서 업무를 할 때 국제적인 비즈니스 언어인 영어의 활용도가 높기 때문에 언어나 문화적인 측면에서 한국 인력들에 비해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반만, 한국인은 어학적인 부분이나 글로벌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서 현지인들과 소통에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가치관은 본인의 경험과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기 마련인데, 한국에서 교육을 받고, 한국 문화만 익숙하며, 한국 회사에서만 일을 한 사람들은 다양성을 인정할 줄 아는 열린 시각과 다양한 관점으로 사고할 수 있는 균형감각을 키우기 힘들다.

문화적, 어학적인 문제 때문에 현채인들을 이끌고 나가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은 둘째 치고, interaction 없이 주재원들끼리만 어울리고 문제가 있어도 소통을 안 하는 ‘방치’ 상태(주로 선진국) 또는 현지에서도 야근, 상명하복 등의 한국식 방식만을 밀어붙이는 양 극단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교포나 유학생 등 해외에서 경험이 있는 한국인들은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이러한 인력들은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국내 기업문화에 적응을 ‘안’하고 떠나거나 국내 ‘뚝심’인력에게 밀려 주재원 등의 핵심 포지션에 선발되지 못한다. 그리고 가장 충성스럽고 ‘한국적’인 Mindset으로 무장한 국내용 인재가 주재원으로 선발되어 해외 곳곳에 보내진다.

관련 기존에 썼던 블로그 글:

1. 주재원 선발의 문제점과 해외 교포들의 피해
본사에서 하던, 세계 어디에도 찾아보기 힘든 비상식적인 데드라인과 구성원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경영방식에 맞추라고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주재원 선발 시에도 해외경험과 해당 법인의 필요한 직무(function)에 전문성으로 무장된 인력이 아니라, 그 동안 희생을 많이 한 로열티 강한 인력, 및 본사에서 평가가 좋았던 인력이 선발되는 경우가 많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인력이 해외 나가서 본인이 아는 유일한 세계인 한국, 더 좁게 본다면 회사에서 성공했던 방식으로 경영을 하거나 인력 ‘관리’를 하려고 하는 데서 문제가 비롯된다.

2. 뚝심 인력, 글로벌화의 최대 장벽
주요 포스트에 포진되어 있는 ‘뚝심 인력’이 기득권을 꼭 움켜쥔 채 글로벌 환경에서 통용되는 범용적인 실력보다는 뚝심과 맷집이 더 중요시하는 기업문화를 견고히 한다. Global Talent들이 감히 넘어오지 못하게 말이다. 그러면서 경영진은(본인들도 뚝심 인력인) 왜 글로벌화가 더딘지 의아해 한다.

한국용 인재, 글로벌 인재로

“우리 예전 법인장님 잘 계시죠? 꼭 한번 찾아 뵙고 인사 드리고 싶어요.” 한국으로 리더십 교육을 받으러 온 외국인 직원 손에는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선물이 어김없이 들려 있다. “이건 함께 근무하셨을 때 매일 아침 즐기셨던 전통 차에요.” 소박하지만 정성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런 상사는 함께 일하던 직원이 아무리 낮은 직급이라도, 본인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시간을 내어 점심이나 저녁을 대접한다.

이렇듯, 외국에서의 경험이 별로 없는 한국형 인재가 해외에 가서 현채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신뢰도 쌓고, 리더십도 발휘하여 실적도 잘 내는 경우도 간혹 있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까? 현채인들에게 물어보면 그리 거창한 것들이 아니다. 작은 것들이다. 본인들의 문화와 방식을 이해해 주고, 자주 칭찬해 주고, 의견을 경청을 해 주는 것. 하지만 한국의 리더들이 가장 부족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렇듯 본인이 속한 문화권의 방식이나 행동만을 옳은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그것을 포용하는 Global Mindset에 대한 교육은 더 없이 중요하다. 하지만 주재원과 현채인들의 교육을 하며 깨달은 것은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진심인 것 같다.

앞으로 Global Mindset을 갖추고 진심으로 현채인들을 대해줄 많은 글로벌 인재들이 나오길 바란다.

[한국 문화와 HR] 단일민족과 Global Mindset

Global Mindset

Global Mindset에 대한 강의를 한국과 해외에서 몇 년째 하고 있다. 대상에 따라 하는 강의 내용과 방식을 Customize 하지만 내가 주고자 하는 공통된 메시지는 ‘다양성을 받아들이기’ (Accepting Diversity) 이다. 즉, 본인이 속한 문화권의 방식이나 행동만을 옳은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그것을 포용하는 것이 Global Mindset의 출발점이란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에게 Global Mindset, 즉 다양성을 포용하는 데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역설적으로도 우리의 독특한 장점인 ‘단일민족’이라는 점이다.

오랫동안 단일민족임을 자부심으로 여겨온 한국인에게는 다양성, 즉 다르다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저항감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유난히 남들의 시선이나 본인이 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한다. 대기업의 임원들은 대부분 면도를 깨끗이 하고 짙은 색의 정장을 입고 있고 비슷한 색상의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여가시간에 골프를 친다. 이것은 학생 때부터 학습된 결과로 심지어 직업이나 학교도 남들에게 인정받는 순위로 선택한다. 남들과 같아야 한다는 집념, Global Mindset의 부재에서 오는 획일화의 결과이다. 아래는 관련 기존에 썼던 블로그 글:

[한국 사회] 정답의 길에서 벗어나 내 자신으로 살기

유독 한국인들은 사회에서 만들어진 좁디좁은 ‘정답의 길’ 속에서 벗어나길 두려워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하나의 길만을 ‘정답’으로 여기고 끊임없이 걸어온 아이들은 직업 선택, 회사 선택에 있어서도 본인의 내면의 목소리 보다는 남들의 시선과 사회적 체면으로 구성된 ‘정답의 길’을 걸어간다. 내가 말하는 ‘정답의 길’이란 사회의 시선과 삶의 획일화로 인한 학교, 직업, 회사 등의 선택의 속박이다. 모두가 ‘이것이 정답이야’, ‘이 길을 벗어나면 넌 낙오자야’ 라고 이야기하면, 아무런 확고한 의지가 있더라고 좀처럼 그 길에서 벗어나기란 힘들다는 거다.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이 튀는 것도 ‘우리’라는 틀을 위협하는 부정적인 요소로 치부하고 안 좋게 본다. ‘다름’을 불편해 하는 한국적인 정서와 그와 상반되는 Global Mindset 사이에 균형 잡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조기유학생이나 외국인들이 한국 기업문화에 길들여 지기를 거부하고 한국 기업을 떠나는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너를 ‘한국화’ 시키는 것이 내 목표야.”

일이 끝났으면 퇴근하고, 다양성을 배척하는 기업문화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임원의 의견이나 명령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나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몇몇 상사들이 그렇게 공표를 했었다.

물론 성공한 사람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본다(사실 이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의 ‘권위의식’, ‘두려움’, 또는 ‘후배를 잘 가르치기 위함’ 이란 가벼운 명분보다 Global Mindset과 다양성이 필요하다는 나의 소신과 믿음이 훨씬 더 무겁고 뿌리 깊기 때문일 것이다.

“회사를, 더 나아가서는 대한민국을 ‘글로벌화’ 시키는 것이 내 목표야.”

Global Mindset상사들이 나를 ‘한국화’ 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나는 반대로 회사를 ‘글로벌화’ 시키기 위해 보고서를 쓰고, 회의자리에서 발언을 하고, 강의나 발표 등 틈 날 때 마다 Global Mindset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블로그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Global Mindset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퍼트리고 한국을 더 글로벌화 시키는데 조금이나마 기여 하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과거 한국 제조업을 세계 최고로 올려놓은 건 한국인들의 집념, 근면성실성 그리고 스마트함이지만 앞으로는 Global Mindset이 없으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둡다고 생각한다. 반면, Global Mindset을 갖춘다면 세계적인 기업들을 배출 할 뿐만 아니라 기업문화에 많은 긍정직인 변화를 가져와 임직원은 물론 가족들의 행복에도 크게 기여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한국 문화와 HR] ‘저녁 있는 삶’이 비정상이 되어버린 사회

LA에서는 오후 3시 반부터 길이 막히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퇴근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나오기 때문이다. 정해진 시간 동안만 회사에서 보내면 되는 Flexible Time이 대부분의 직장에서 정착이 되어 있고, ‘실제로’ 실행이 되고 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선택’ 하는 미국의 샐러리맨 

물론 미국에서도 컨설팅, 투자은행, 사모펀드, 로펌(law firm) 등은 물론, 일반 직장에서도 한국 직장인들 이상으로 오래, 더 치열하게 일하는 샐러리맨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의 직장인들의 행복도 및 ‘일과 삶의 균형’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선택’ 할 수 있는 자유인 것 같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보직을 받거나 임원이 되고 싶어하는 한국의 샐러리맨과는 다르게 미국 사람들은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해 승진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일 처리가 빠르고, 나름대로 눈치도 있으며 대인관계도 좋은 직원을 승진시키려 했더니 거부를 해서 당황했다는 주재원들이 많다. 한국에서는 온갖 생색을 내면서 승진을 시켜주면 고마워하면서 크게 한턱을 내는 게 당연한 문화인데, 미국에서는 ‘몇 안 되는’ 일 잘하고 똑똑한 직원들을 Manger 역할을 맡아달라고 오히려 부탁을 해야 하니 말이다.

미국 최대 온라인 구직 사이트인 CareerBuilder가 3,625명의 설문을 받은 결과 미국 직장인의 34% 만이 리더십(부장 이상) 역할을 하고 싶어 했고, 7% 만이 C-Level(고위 임원급)이 되기를 희망하였다. 가장 큰 이유는 ‘현재 업무/직무에 만족해서'(52%) 였고, 그 다음이 ‘일과 삶의 균형'(34%) 때문이였다.

Not everyone wants managment positions

이렇듯 미국에서는 획일적인 ‘성공’의 잣대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높은 직위나 ‘일과 삶의 균형’ 등 본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성공’을 선택하고, 회사는 그것을 받아들일 여유가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한국 기업들은 어떠할까?

미국에서의 한국 기업의 모습

“은책임님, 교육을 일찍 끝내줬으면 하는데요. 3시반에 퇴근하는 직원들이 있어서요.” 한국 회사원의 관점으로는 칼퇴근족인 내 시각에서도 3시 반 퇴근은 파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근면과 성실, 즉 ‘많이 오래 일하는 것’이 미덕인 한국 기업의 시각에서는 어떨까?

여러 사례나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런 문화를 존중해 주기 보다는 이들의 입장에서 ‘정상적’인 일과 삶의 조화를 무시하고 ‘비정상적’인, 즉 ‘한국식’의 방식을 요구함으로써 많은 문제점들을 불러오고 있다.

<이코노미조선 2014년 9월 기사>

국내 기업들에 대한 평판은 박한 편이다. 삼성전자의 글라스도어에서의 평점은 불과 3.1점. 경쟁사인 애플(3.9점)은 물론 당시 리스트에 있던 기업들의 평균(3.6점)에도 못 미친다. LG전자 (3.1점), 현대그룹(3.3점), SK하이닉스(2.6점)의 평점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한국 기업이 낮은 평점을 받는 공통된 원인은 ‘야근’으로 대표되는 과도한 업무량이었다. ‘개인적인 삶은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을 제 시간에 끝낼 수 없다’는 식의 코멘트는 다반사고, 심지어 ‘무기력하게 일만 하는 좀비 월드’라는 극단적인 혹평도 볼 수 있었다. 경영진의 능력 부재를 지적하는 글도 적지 않았다. 아래 직원이 의사 결정에 개입하기 힘든 수직적인 구조와 직원 복지에 무관심한 임원진을 꼬집는 글이 특히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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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스도어(www.glassdoor.com): /현직 직원이 해당 직장에 대한 평판을 적는 웹사이트

작년에 이어 지난달에 미국법인 직원들 교육을 하면서 기업문화에 대한 토론과 설문을 실시했다. 그들의 의견들도 위에 글레스도어에 나왔던 반응들과 흡사했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은 미국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베트남, 영국, 중국 등의 임직원들도 ‘비정상적’인 한국의 경영방식과 기업문화를 부정적으로 보고 한국 기업들을 매력적인 직장으로 보고 있지 않다.

각 국가 및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그에 가장 적절하게 customize하여 경영을 하고 실적을 취합하기 보다는 본사에서 하던, 세계 어디에도 찾아보기 힘든 비상식적인 데드라인과 구성원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경영방식에 맞추라고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문화와 HR] 주재원 선발의 문제점과 해외 교포들의 피해

선택권이 없는 한국 샐러리맨의 비애 

한국에서 매일 칼퇴근을 할 수 있는 직장은 드물다. 그러한 훌륭한 직장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샐러리맨이 다니는 ‘일반적’, 또는 ‘장상적’인 직장에서 정시에 퇴근을 하면 ‘비정상’이 되는 게 현실이다. 회사 내에서 인정을 받고, 속히 ‘잘나가기’ 위해서는 야근 및 주말출근 등, ‘비정상적인 삶’이 필요조건이 되어버린 경우가 허다하다.

절대적인 근무시간과 무조건적인 충성이 한국 대기업의 사다리를 오르는데 필수라는 것을 깨달은 후, 나는 그 게임에서 빠지기로 결정했다.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직속 상사는 물론 임원들에게도 나의 목소리를 높였고, 업무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임했고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야근과 주말근무는 되도록이면 하지 않았다.

문제는 게임에서 빠졌다고, 나는 이 조직에서 계속 승진을 하고 좋은 평가/고과를 받기보다는 가족들과의 시간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상사와 동료들로부터의 ‘압력'(peer pressure)이 있다. 한국에서 획일적으로 정해진 ‘성공’ 벗어나 일과 삶의 균형의 행복을 택한 사람들은 회사에서 ‘일 안 하는 놈’, ‘충성도 떨어지는 놈’, ‘언젠가 회사 옮길 놈’으로 낙인 찍히기 마련이다.

조직 충성도와 가정 충성도는 반비례 

나를 희생정신이 없다고, 개인주의자라고 생각하는 회사동료들과 상사도 분명 많을 것이다. 특히 나의 상사들은 집단주의에 반하는 나의 행동들과 발언들로 인해 본인과 부서가 남의 눈에 어떻게 비춰질지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직에 충성하는 것과 가정에 충실한 것은 반비례 한다고 생각한다. 잦은 야근과 주말 출근을 하면 당연히 아이들이나 배우자에게 부실 할 수 밖에 없지 않나? 직장과 가족 중에 무엇이 더 소중한가?

지금 한국의 회사가 암묵적으로 야근을 강요하는 것은 임직원의 삶을 담보로 성과를 키우라는 거다. 일과 삶의 조화를 존중하는 외국의 회사들과 공정한 싸움이 아니다. 심지어 장기적으로는 실적과 기업 경쟁력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다. 임직원들 가족을 인질로 잡고 매일매일의 ‘삶’을 빼앗아가는 짓은 그만 했으면 좋겠다.

임직원들도 바뀌어야 한다. 늦게 퇴근하기 치킨게임은 이제 그만하고 눈치보고 있지 말고 용기를 내서 ‘나부터’ 퇴근을 한번 해보자. 아니면, 최소한 일찍 퇴근하는 직원들을 펌하하지 말아주길. 먼 훗날 본인들 자녀가 취직을 해서 저녁 있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말이다.

[한국문화] 질문 없는 사회

Why don’t Korean students ask any questions?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참 많이 받은 질문이다. 유독 한국학생들은 질문을 잘 안 할 뿐만 아니라 본인의 주관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것에 소극적이다. 내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초등학교 때는 덜 한데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으로 갈수록, 즉 한국에서 오래 살았던 기간이 길 수록, 그런 경향이 더 강하게 나타났던 것 같다.

성인이 되어서도 미국과 EU 등의 서양인들은 물론, 중국과 인도네시아 등의 타 동양인들과 비교해서도 한국인들은 질문을 잘 안 한다. 그래서 외국인들과는 이런저런 질문들 때문에 3시간도 모자란 강의를 한국사람들에게 처음 했을 때 2시간 만에 끝나버려 당황했던 적이 있다.

질문없는 사회
<EBS,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 中>

지난 2010년 G20 서울 정상회의 폐막식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기자들에게 몇 번이나 재촉을 했는데도 아무도 질문을 안 해서 결국 중국 기자가 질문을 했던 에피소드를 기억 할 것이다. ‘질문’이 직업인 기자 수십 명이 전 세계가 주목하는 대상인 미국 대통령에게 ‘아무 질문’이나 할 수 있는 기회를 ‘수 차례’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마디도 못한 건 어떻게 보더라도 부끄러운 일이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자리에서 ‘격’에 맞지 않는 질문을 할까 망설였던 걸까? 세계에서 가장 권력이 막강한 사람에게 ‘실례’가 되는 질문을 할까 봐 두려웠던 걸까? 엉뚱한 질문을 한 기자로 기억될까 봐 가만히 있었던 걸까? 본인의 질문에 언론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한 걱정이 앞섰던 걸까?

사실, 기자들만의 잘못만은 아닐 거다.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 밖에 없다. 예절과 격식을 강조하는 유교 문화권에서 어른들이나 선생님 말씀은 잘 따라야 하는 것이며, 이의를 제기하고 질문하면 말대답하는 ‘예의 없는 아이’로 비춰진다. 군대에서는 어떤가? 명령의 옳고 그른 것을 논하거나 원인과 이유 등을 질문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환경에서 끊임없이 명령에 복종하는 법을 훈련 받는다. 인구의 50% 이상, 회사 경영진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남자’들이 이끌어가는 한국 기업세계에서는 이러한 상명하복의 ‘정신’이 자연스럽게 기업문화에 녹아 들어가 있다.

“부장님 이건 왜 해야 하는 거죠?”, “그 방식보다는 이 방식이 더 좋은데, 왜 그걸 선택 하셨죠?” 이러한 질문들은 중간관리자들인 386세대(60년대 초중반~70년대 초 출생)를 곤혹스럽게 할 것이다. ‘질문’을 하면 건방지다고 생각하는 베이비부머 세대(50년대 중반~60년대 초 출생)인 본인의 상사들에게 업무를 받아와, 그 일의 ‘의미’와 ‘목적’을 명확하게 알고 싶어하는 질문 많은 팀원들에게 시켜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1년도 체 안돼서 깨닫게 된다. 정답은 “사장이(윗사람) 시켰으니까” 이며, 그러한 질문이나 이의제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음에도 상사의 지시에 대한 ‘질문’을 하거나 상반되는 의견을 제시하기를 지속하면 ‘조직생활 못하는 놈’, ‘건방진 놈’으로 찍힌다.

창의와 혁신의 원동력인 질문

“이 부분이 잘 이해가 안가네요. 더 상세하게 설명 해 주실 수 있나요?”
“왜 그렇게 생각 하시죠? 이 방식이 더 괜찮을 것 같지 않나요?”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대화 내용이지만 사실 한국 사회에서는 매우 부족한 이러한 ‘질문’들. 질문은 상대방으로부터 필요한 정보를 끌어낼 뿐만 아니라, 혹시 있을 오해를 줄이고, 더 좋은 아이디어를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게 하는 소통의 기본 요소이다. 무엇보다도 앞으로 점점 중요시되는 창의와 혁신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기업이 창의와 혁신을 외치지만 실상은 ‘권한’을 쥐고 있는 경영진은 시키는 일에 토를 안 달고 묵묵히 일을 하는 직원들을 선호한다. 사장님 말씀에 손을 들고 이의를 제기한 임원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는 조직 피라미드의 가장 끝, 신입사원들에게까지 전해진다. 이런 질문이 사라진 기업 내의서의 임직원들간의 관계가 전반적인 업무에 미치는 영향은 굉장히 심각하다. ‘질문’을 통한 자유로운 토론과 상호소통이 부족한 문화에서는 결코 혁신적인 제품과 서비스가 나올 수 없다. 지금 여러 대기업에서 직면한 문제점들처럼 말이다.

Every child is an artist.  The problem is how to remain an artist once we grow up.
모든 아이들은 예술가이다.  문제는 어른이 되어서도 어떻게 우리 자신을 예술가로 유지하는가에 있다.   -피카소 –  

“아빠 배트맨이 더 쌔 파워래인져가 더 쌔?”, “오토바이가 더 빨라, 배가 더 빨라?”, “왜 냄비뚜껑은 방패모양처럼 생겼어?” 우리 아들은 참 질문이 많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설명하기 매우 난해한 질문들 때문에 가끔은 질문들을 무시를 하거나 괜히 칼 싸움이나 하자고 신경을 돌려버린다.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이런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결국 이렇게 아이들의 질문이 무시되고 묵살되면서 사회에 길들여지면서 ‘질문 없는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니겠나? 오늘부터는 반짝이는 우리 아들의 눈을 응시하며 정성껏 대답하고 소통해야겠다. 우리 아이들이 컸을 때 대한민국이 ‘질문 없는 사회’를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말이다.

 

[한국사회와 HR] 한국 리더십의 진화가 필요한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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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회사와 미국회사의 중요한 차이점으로 한국은 일사분란하게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반면 미국은 개인 단위로 움직인다는 점을 꼽는다. 이것은 한국인들의 ‘집단주의’ 성향의 영향도 있겠지만 <집단주의와 Globalization 참고> 한국의 리더십 스타일도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조직이 우선시되는 회사에서는 지위가 곧 리더십이다. 토론을 통해 의견을 모으고, 다양한 관점들을 반영하여 아랫사람들을 설득할 필요가 없다. 군대와 같이 Top down식의 수직적인 구조로 개인의 개성과 의견을 존중하기 보다는 집단의 방향에 철저히 맞춰야 한다. 따라서, 조직을 위한 개인의 희생과 헌신은 당연한 문화로 정착되며, 상사들의 명령은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불문율이 된다. 상사들은 여러 면에서 자기가 ‘관리’하는 직원들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며, 막대한 권력이 주어진다. 그리고, 주어진 권력을 활용하여 조직을 확실하게 이끄는 카리스마 있고 결단력 있는 리더십으로 엄청난 추진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조직 ‘관리’에 집중한 리더십 형태는 위에서 의사결정을 하면 모두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효율성’과 ‘생산성’을 극대화하여 지금까지 한국 경재 성장을 이끌어낸 굉장한 경쟁력이기도 하다. 아직까지도 조선, 제조, 건설 등 전통적인 산업에서는 삼성, 현대, LG, 포스코 등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한 경쟁력을 갖추고 세계무대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리더십의 반대말은 ‘관리’

리더십과 반대되는 말은 ‘관리’다. 관리는 어제보다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낮은 비용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우리는 관리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복종의 미덕을 찬미하고, 끊임없이 비용을 낮추고, 오차를 줄이면 된다. 반면, 리더십은 차원이 다른 게임이다.

진정한 리더는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다른 이들을 완전히 통제하려 들지 않는다. 그리고 값싸고, 빠르고, 복종적인 안전한 세상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간다.

– 세스 고딘, <이카루스 이야기 中>

세스 고딘은 아마 위에서 언급한 한국의 조직 효율성과 생산성에 집중한 ‘관리’는 오늘날에서는 진정한 리더십이 아니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한국 기업들은 아직도 이러한 리더십으로 임직원을 ‘관리’한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형태는 한국의 고질병인 눈치문화를 만들어내는 주범이라고 생각한다. <세계 제일의 Talent, 세계 하위의 노동생산성: ‘눈치’ 문화 참고>

리더십의 진화가 필요한 시점

산업의 진화와 글로벌화에 맞춰 조직의 관리나 리더십의 형태는 진화할 필요가 있다. 상대적으로 경제수준에 비해 한국이 취약한 software 중심의 IT 산업, 금융업, 서비스업 등은 권한을 가진 리더가 위에서 의사결정 한 데로 긴밀하게 움직이는 상명하복 식의 ‘조직적인 움직임’보다는 창의력과 다양성을 포용하는 문화와 개인단위로의 권한이양이 필수이다.

또한, 글로벌 환경에서 성공하기 힘든 리더십 형태이다. 한국 기업들의 이러한 ‘조직 중심’의 문화는 다양성과 개인의 특성을 존중하는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통용되기 힘들다. 함께 업무를 하거나 교육과정을 운영하면서 느끼는 점은, 비단 미국, 유럽뿐만이 아니라 공산권 국가인 중국과 베트남 회사들의 리더들도 한국만큼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행동을 요구하지 않으며, 한국의 강압적인 리더십에 반감을 가진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외국인 뿐만 아니라 요즘 한국의 젊은 세대도 점점 개인적인 개성과 성향을 존중하는 리더와 일과 삶의 균형(Work life balance)이 있는 기업을 선호하고 그러한 환경에서 업무 효율도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지금 세계를 움직이는 기업들을 보라. 생산성과 효율성 보다는 창의력과 혁신적인 가치가 경쟁력인 시대이다. 아직도 많은 한국의 대기업들은 오랫동안 쌓아온 기업 문화와 업무 관행을 버리지 못하고 ‘관리’에 집중하고 있다. 오히려 새로 생기는 다양한 벤처회사들이 리더십과 조직운영 관련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나는 이들에게서 다양하고 성공적인 한국형 리더십 스타일이 나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국 vs 미국] 한국과 미국의 ‘친구’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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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 한글사전,  2014 Merriam-Webster Dictionary

위에 ‘친구’와 ‘Friend’ 정의의 차이점을 보자. 영어의 ‘Friend’의 의미는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 또는 ‘무엇이나 누군가를 도주는 사람’ 이다. 반면, 한국의 ‘친구’라는 개념은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으로 미국의 ‘Friend’보다 더 깊은 감이 있다.

미국에서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을 다녔던 나의 예를 보자. 지금까지 ‘연락’하고 한국에 방문하거나 해외에 가게 되면 만나는 외국인 친구들은 있지만, 내가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인이다. 미국에서 사는 교포들도 대부분의 절친(Best Friend)들은 같은 한국인이거나 동양인인 경우가 많다. 이것은 미국과 한국의 친구에 대한 개념이 너무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

미국은 국가 자체도 넓고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그런지 ‘평생친구’라는 개념이 한국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 같은 회사, 학교, 또는 동네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나누고, 가족들을 집에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는 등, 쉽게 가까워진다. 반면, 다른 회사나 지역으로 이사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는 경우가 많다. (물론 미국사람들도 어렸을 때부터 평생 가져가는 친구도 당연히 있지만 상대적으로 덜 그렇다는 것이다). 또한, 아주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도 일정한 거리가 존재하며, 이러한 거리 속에서 우정을 나눈다. 예로, 새벽 6시에 3~4시간을 운전하여 우리 엄마를 공항에 픽업 가달라는 부탁을 한국 친구에게는 할 수 있겠지만, 미국 친구한테는 정말 급박한 상황이 아닌 경우 부탁하지 않을 거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예로는, 미국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 몰래 한국 아이들끼리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기숙사 방 침대에서 같이 잠들곤 했는데, 이것을 본 미국 친구들은 우리들을 당연히 동성연애자인줄 알았다. 이들의 문화에서는 아무리 절친이라 하더라도 한 침대를 Share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팬티바람으로 자고 있는 우리를 보고 “Holy shit! I’m sorry!” 라며 당황하면서 뛰쳐나간 미국아이들이 여럿 기억난다.

코코넛 같은 한국사람들, 복숭아 같은 미국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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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차이를 INSEAD의 Cross Cultural Management 교수인 Erin Meyer가 Harvard Business Review에 기고한 <One Reason Cross-Cultural Small Talk Is So Tricky>에서 흥미롭게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친해지기 어렵지만, 한번 친해지면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는 문화권을 겉은 딱딱하지만 속은 말랑말랑한 코코넛에, 개인적인 이야기들까지 할 정도로 쉽게 친해지지만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문화권을 겉은 무르지만 속에는 딱딱한 씨가 있는 복숭아에 비유한다. 같은 서양(Western) 이라도 유럽권은 코코넛이 많고, 미국이나 브라질 등 미주(Americas)는 복숭아 문화권이라고 한다. 당연히 한국은 매우 단단한 코코넛인 것 같다.
*코코넛과 복숭아의 비유는 2000년, ‘Building Cross-Cultural Competence’에서 Charles Hampden-Turner과 Fons Trompenaars가 처음 소개

형, 동생, 누나, 언니, 오빠…… 그리고 친구.

회사에서 외국인 ‘동료’들을 소개할 때 아주 쉽게 ‘My friend’는 붙여도, 한국말로 선뜻 ‘친구’로 표현하기는 어색한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친구’의 뜻이 특별하고 굉장히 제한되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한살이라도 더 많으면 형, 누나, 언니라는 호칭이 붙고 우정을 나눌 순 있지만 친구가 될 수는 없다. 또한, ‘가깝게 오래’ 지낸 사람이어야 함으로 오랜 기간 동안 같은 동네, 학교, 회사 등에서 부대끼며 지내야지만 ‘친구’가 된다. 심지어 나이를 어느 정도 먹고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친구’보다는 ‘동료’ 정도에서 머무는 경우가 더 많다.

이렇듯, 우연히 같은 년도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 여러 제약조건을 다 맞추고 10년, 20년 이여지는 우정이 한국의 ‘친구’이다. 멋지지 않은가? 이런 깊이 있고 소중한 친구들이 한국의 빡빡한 삶을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지 않나 싶다.

[한국문화와 HR] 주재원 선발의 문제점과 해외 교포들의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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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글이 해외에서 오래 생활을 하고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TCK(Third Culture Kids)에 관한 글이었다면(Link: 한국 사회에서 길을 잃은 제3문화 아이들(TCK) 에게), 이번에는 해외에 있는 한국 대기업에서 일하는 주재원들과 현지에서 채용된 현지 교포와 유학생에 대한 글을 써볼까 한다.

회사를 이끌어 나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회사(경영진)와 직원들간에 신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뢰는 서로간의 이해와 존중, 그리고 원활한 소통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경영진이 나와 말도 잘 안 통하고, 우리의 문화를 무시하고, 나와 나의 가족의 삶의 희생을 요구하면서, 명확한 비전을 제시해 주지 못하면 어떨까? 이것이 많은 한국 대기업의 해외 법인에서 주재원과 해외 인력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점이다.

한국 경영방식과 주재원 선발의 문제점

한국 주재원들은 어학, 로컬 문화 이해, 규정, 리더십의 역량 부족으로 해당 주재 국가의 현지인들을 이끌어 가기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다. 이문화에 대한 이해 (Cross cultural sensitivity) 및 해외 경험 부족 등의 영향도 크지만 사실 개인의 문제보다는 본사, 특히 경영진과 인사부분의 주재원 선발방식의 문제가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우선 각 국가 및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그에 가장 적절하게 customize하여 경영을 하고 실적을 취합하기 보다는 본사에서 하던, 세계 어디에도 찾아보기 힘든 비상식적인 데드라인과 구성원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경영방식에 맞추라고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당연히 주재원 선발 시에도 해외경험과 해당 법인의 필요한 직무(function)에 전문성으로 무장된 인력이 아니라, 그 동안 희생을 많이 한 로열티 강한 인력, 및 본사에서 평가가 좋았던 인력이 선발되는 경우가 많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인력이 해외 나가서 본인이 아는 유일한 세계인 한국, 더 좁게 본다면 회사에서 성공했던 방식으로 경영을 하거나 인력 ‘관리’를 하려고 하는 데서 문제가 비롯된다.

주재원과 현지인과의 문제

주재원으로 선발된 인력들에게 해외 파견 전까지의 시간은 회사생활 최고의 황금기다. 본사에서 비록 과장, 차장급이라도 해외 법인에서는 중책을 맡는다. 내 사람들을 거느리고 중요한 업무를 맡는 것은 물론, 주재 수당, 아이들 학비, 렌트비 등 회사에서 많은 지원을 받게 된다. 무엇보다 회사에서 본인의 능력이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가족들도 해외 생활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물론 지역에 따라 틀리고, 해외 생활 자체를 싫어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가족들에게도 뭔가를 해줬다는 생각에 뿌듯함을 느낀다. 오랫동안 못 볼 친구들과 회사 동료들과 한잔씩 하면서 축하를 받고, 출국 날이 다가오면서 속으로 다짐한다. “가서는 정말 더 열심히 해야지. 나를 주재원으로 뽑은 게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야지”.

하지만, 이렇게 회사의 대한 충성도와 업무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채 해외법인에 출근을 하자만, 첫날부터 모든 것이 틀어지기 시작한다. 성과를 최대한 내고 싶어 안달이 났는데, 내 직원들은 칼퇴를 한다. 하루 이틀은 그냥 넘겼지만, 본사에서 계속 요구사항이 들어오고, 본인도 피곤해 지면서 현지인들에게 한국에서처럼 ‘쪼기’ 시작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담한 반응과 많은 퇴사자들 뿐이다.

여러 실패, 가끔은 혹독한, 경험을 통해 경영방식을 바꿀라고 해도 이미 현지인력들의 신뢰를 잃은 후고, 커뮤니케이션에도 여전히 문제가 있고, 본사에서는 계속 수많은 요구 사항들을 요청해서 출구가 없어 보일 때 구세주가 나타난다. 바로 현지 교포들이다.

한국 교포들의 역차별 (Reverse discrimination)

교포들은 로컬 언어와 한국어가 둘 다 가능하고 어느 정도 ‘한국적인 정서’까지 갖춰서 일단 커뮤니케이션에 큰 문제가 없다. 또한, 말도 안 되는 일정이 겹쳐서 야근이 불가피한 경우에 정에 호소하거나 한국식으로 지시를 해서든 어떠한 방식으로든 일정을 소화하게 한다. 신뢰를 잃고 커뮤니케이션에 얘를 먹고 있는 현지인력과의 소통에서 중간역할을 해주는 것은 물론이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이렇게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당연히 많은 업무가 교포들에게 돌아간다. 그래도 교포들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참는다. “그래도 한국 회사고 내가 일도 더 많이 열심히 하는 것을 주재원들이 아니깐 나중에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챙겨주겠지.” 그렇게 견디면서 몇 년이 지나고, 나의 희생과 노력에 대한 History를 아는 주재원들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새로운 주재원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다. 그 동안에 수고를 인정해줘서 본사에서 자리를 마련해 준다던지 더 빨리 승진을 시켜주지 않는다. 더 분노가 쌓이는 것은 주재원들이 시키는 커리어에는 도움 안되지만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잡다한 일들을 안하는 외국 현지인들은 칼퇴를 하면서도 더 대우가 좋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래도 한국회사라는 동질감, 혹시 향후 좀 더 챙겨줄 것이라는 기대감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배신감을 느끼고 타 회사로 옮기는 경우가 많이 나타난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갈 방향?

가장 중요한 변화는 권위와 통제의 낡은 한국식 경영방식을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나는 회사의 가치와 문화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회사 존립과 회사 Identity에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다. 나는 다만 그것들은 지금의 세대에 맞게 진화 시키는 것은 물론, 각 국가에 맞게 customize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재원 선발 방식의 변화도 매우 중요하다. 무조건 본사에서 평가를 잘 받고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 힘있는 임원이 밀어주는 사람들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해외 나가서 성공적인 업적을 남긴 주재원들의 특징과 역량들을 분석해서 그 요소들 중심으로 주재원 선발을 할 필요가 있다. 내가 인터뷰 했던 외국의 많은 회사들은 이러한 Database를 꾸준히 관리하고 update에 신경을 많이 쓴다고 한다. 이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가장 중요한 요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지막으로, 교포들에게 커리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많은 경우, 지금 한국 대기업들의 수준으로는 교포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 한국의 국내 본사 중심의 경영방식은 오랫동안 바뀌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현지인들과 주재원 간의 mediator 역할부터 한국 본사와 직접 한국말로 소통 할 수 있는 주재원들을 현지 인력보다 더 많은 기회와 커리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서 길을 잃은 제3문화 아이들(TCK) 에게……

TCK

한국 사회에서 길을 잃은 제3문화 아이들(TCK) 에게……

“내가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은 어디이지?”, “한국에서 적응을 하고 잘 살 수 있을까?”, “한국 기업의 권위적이고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지 않는 문화와 난 맞지 않는 것 같아”, “어디서 사는 게 가장 행복할까?”, “언젠간 다시 그곳으로(미국, 사우디, 영국, 필리핀…… 등등) 돌아 갈 수 있을까?”

본인이 해외에서 오래 생활을 하고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TCK(Third Culture Kids)라면 위와 같은 생각들은 적어도 수십 번은 해 봤을 것이다.

TCK(Third Culture Kids)의 정의

TCK(한국어로는 ‘제3문화 아이들’이라고 표현)란 단어는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인 Ruth Useem이 처음으로 사용하고, 차후 사회학자 David Pollock이 더 상세하게 정의 내린 용어로 “성장기의 상당 기간을 부모의 문화가 아닌 다른 문화권에서 보낸 사람”(TCK is a person who has spent a significant part of his or her developmental years outside the parents’ culture)을 뜻한다. 즉, 아직 정체성이 형성되기 이전(적어도 18세 이전) 해외 생활을 시작한 조기 유학생, 외교관 자녀, 선교사 자녀, 주재원 자녀 들을 TCK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위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였던 TCK이다. 지금은 가족, 나 자신의 Career, 현실, 의지, 그리고 꿈 등 여러 중요하고도 복잡한 요소들에 대한 깊은 고민 끝에 어느 정도 답을 낸 상태이다.

TCK(Third Culture Kids)의 고민

하지만, TCK들이 얼마나 ‘외로운’ 고민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몸소 경험한 한 사람으로서, 아직 어려움을 겪고 있는 TCK들을 위로해 주고 그 고민의 해답을 찾아 나가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고, 더 나아가서는 본인은 아니더라도 주변 동료, 친구, 가족 중 TCK가 있다면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이 주제에 관하여 글을 쓰기로 했다.

고민들과 어려움을 ‘외롭다’고 표현 한 이유는 TCK들이 아니고는 이 같은 고민들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공감’하기 굉장히 힘들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장 가까이에서 TCK 자녀를 지켜본 그들의 부모라도 말이다(그들은 이미 정체성이 형성이 되었기 때문에).

TCK(Third Culture Kids)와 한국의 교육

뒤돌아 보면, 미국과 한국을 오가면서 내가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가 두 번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첫 번째는 미국에서 한국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로 전학 왔을 때다. 80년대 한국의 국민학교는 미국에서 온 나에게 너무 많은 문화 충격(Culture Shock)을 주었다. 나 전학 간 첫날 숙제 안 한 아이들을 책상 위에 무릎 꿇게 하고 때리던 모습은 내 기억 속에 각인되어 어제처럼 생생히 기억난다. 미국이었다면 그 교사는 바로 구속 되었을 것이다.

또한, 학생들에게 청소를 시킨다는 것(미국은 청소부가), 아이들을 성적에 따라 줄을 세운다는 것, 억지로 우유를 먹게 하고 빈 각을 검사하는 것(미국은 특정 음식을 절대 억지로 먹이지 않음), 한꺼번에 듣는 과목들이 미국에 비해 엄청 많다는 것(무슨 의미인가?), 학교에서 실내화를 신어야 한다는 것(선생님들은 구두?), 심지어 선생님에게 매일 숙여서 인사한다는 점 등, 한국 친구들은 숨을 쉬듯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이 나에겐 큰 충격이었다. 학교 생활 외에도 같은 학생들끼리 선후배, 형, 동생 따지면서 존댓말 하는 것도 그 당시 나에겐 너무나도 생소했던 기억이 난다.

TCK(Third Culture Kids)와 한국의 기업문화

두 번째 어려움은 한국 대기업 문화와 대면하면서 겪었다. 대기업의 권위적이고 획일적인 문화는 어렸을 때부터 개인의 생각과 개성을 표현 하도록 훈련 받았던 나와는 물과 기름처럼 석기기 힘들다는 것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깨달았다. 이 부분은 여기서 더 다루기 보단 이미 포스팅 된 글에서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생각해서 생략하겠다.

[한국문화와 HR] 집단주의와 Globalization

[한국문화와 HR] 세계 제일의 Talent, 세계 하위의 노동생산성 : ‘눈치’ 문화

[한국문화와 HR] 따뜻하고도 잔인한 한국의 ‘정’문화

이것은 TCK 뿐만 아니라 요즘 젊은 사람들 또는 외국계, Start up 등 더 자율적인 기업문화를 경험한 사람들도 어느 정도 겪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럼…… TCK로 한국에서 살아가기 (Future for TCK’s in Korea)

해외에서 자라면서 ‘이방인’ 취급을 받는 것은 어느 정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지만, 엄마 품처럼 편안하고 따뜻할 것이라고 생각한 내 조국으로 돌아와서 나와 같은 한국인들 속에서 마저 ‘이방인’ 취급을 받고 문화 충격을 경험하면서 많은 TCK들이 소속감 및 정체성의 혼란과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만 이상해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한국사회에 녹아 들어가지 못하는 게 아니라는 것, TCK라는 단어가 존재한다는 것, ‘우리’ 모두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면서 적어도 나는 많은 위로를 받고, 내 자신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차별화된 여러 장점들을 갖출 수 있는 기회를 준 나의 TCK 정체성에 대해 너무 감사하게 생각한다.

점차 Global화 되어 가고 있는 세상에서 TCK는 타 문화에 대한 포용력과 이해력(Cross Cultural Sensitivity)과 Native 외국어능력, 그리고 뛰어난 적응력이라는 한국에서는 찾기 힘든 큰 무기들로 무장이 되어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한국의 학벌과 연고가 굉장히 중요한 한국의 재벌기업 중심의 폐쇄적인 산업 구조였다면, 앞으로는 Global Mindset과 뛰어난 어학능력이 중요시되는 세계무대에서 Global Trend 파악에 능하고 변화에 빨리 대처 할 수 있는 유동적인 회사들이 한국의 성장을 견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의 그 새로운 생태계의 중심에 TCK들이 한국 대기업 또는 벤처회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다!